니르바나의 언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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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레빠의 십만송니르바나의 언덕에서 2020. 5. 4. 07:14
밀라레빠 십만송 이제까지 읽은 책 중에 가장 감동한 책이 두 권이 있는데 하나는 밀라레빠 십만송이고 다른 하나는 선관책진이다. 밀라레빠 십만송은 티벳의 위대한 수행자인 밀라레빠의 처절한 수행기와 깨달음의 노래이다. 선관책진은 중국 선사들의 처절한 수행기와 깨달음에 대한 기록이다. 밀라레빠는 경이롭고 불가사의 한 분이다. 그의 고행은 붓다의 고행에 버금간다. 그는 티벳의 동굴에서 보릿가루를 먹으며 오랫동안 정진했다. 보릿가루가 떨어지자 쇠뜨기 풀죽만 먹으며 정진했다. 갈비뼈가 드러나고 몸의 색깔은 녹색을 띠었다. 그는 해탈하고서도 평생을 동굴에서 명상하며 지냈다. 그의 철저한 무소유의 두타행은 깟사빠 존자에 버금간다. 하지만 그가 위대한 것은 이런 외형적인 것이 아니다. 그가 위대함은 언어능력이다.(깨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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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듣는 수행 법문니르바나의 언덕에서 2020. 4. 21. 06:59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내가 되받지 않는다면 누가 받을 것인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내 짐을 내가 지지 않겠다면 누가 대신 져 줄 것인가?... 대신 밥 먹어 주고 대신 잠자줄수 없듯이, 대신 똥누고 대신 아파줄수 없듯이 내 짐을 어느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은 철칙이다. 한 치의 에누리가 없는 법칙이다. 누가 대신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아무리 관세음 보살을 찾고, 아무리 다라니를 외어도 자작자수(自作自受)의 법칙엔 예외가 인정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대신 짐을 덜어 주고 싶어도, 더 보태 주고 싶어도 야속하지만 예외는 인정되지 않는다. 고로, 지금 내게 닥치는 일체의 경계들, 밖에서 다가오고 안에서 솟아나는 일체의 일들, 사건들은 내가 좋아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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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절에 가는가? 왜 교회에 가는가?니르바나의 언덕에서 2020. 3. 17. 15:04
왜 절에 가는가? 왜 교회에 가는가? 절이 생기기 전에 먼저 수행이 있었습니다. 절이 생기고 나서 수행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절이 생기기 전에 수행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절이나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지 마십시오. 절에 다닌 지 10년, 20년 되었다는 신도들을 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절이나 교회에 다니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이들은 절의 재정에는 보탬이 될 지 모르지만 각자의 신앙생활의 알맹이에는 소홀히 합니다. 절이나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면 안 됩니다. 습관적으로 다니니까 극단주의자들이 "종교는 마약이다 아편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 절에 가는가? 왜 교회에 가는가? 그때그때 스스로 물어서 어떤 의지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삶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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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무문니르바나의 언덕에서 2020. 3. 4. 03:08
사찰은 휴식처이기도 합니다. 지치고 힘든 영혼이 머물다가 치유되서 남아 있거나 떠나거나 합니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 이 말은 맞기도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이니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오게하여 깨달음과 지혜를 향해 나아가게 하여야 하고요, 가는 사람은 끝까지 잡아서 기도와 공부, 봉사를 함께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미 간 사람이거나 가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은 경우엔 체념도 필요합니다. 언제곤 다시 오는거야 당연히 바라지만 체념하고 해야할 일에 더 집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사찰은 휴식처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병원같은 곳입니다. 아파서 왔다가 나아서 돌아가는 병원 말입니다. 그런데 치유가 잘 안돼서, 또는 믿음이 부족해서 병원을 전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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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하고 베풀며 살자니르바나의 언덕에서 2020. 2. 14. 11:13
참회와 감사와 나눔을 실천할수 있는 인간몸을 받아서 살아가고 있는 이생에서의 우리는 매일 조석으로 참회하고, 감사하고, 또, 베풀어 주면서 살아가자. 다음생에는 현재보다 더 나은 환경속에서 안락한 몸 받기를 발원하면서 말이다. 아랫글은 공양칸에 걸려있는 오관게(五觀偈)를 우리말로 해설한 공양게이다. 한번 찬찬히 읽어 보자.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 위해 다른 생명체들의 목숨을 아무 거리낌 없이 빼앗으며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미안하다거나 죄스럽다는 생각조차 않는다. 아니, 당연시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며 제법 고상한척 한다. 인간의 먹을 거리는 모두 다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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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수좌 ~ 적명스님니르바나의 언덕에서 2020. 2. 8. 09:54
낯선 동네로 이사를 갔을 때, 누구나 골목에서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치지만 모르는 사이이기에 누가 지나갔는지 관심이 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두 달 지나면 눈에 익어 무심결에 알아보게 되고, 그러다 문득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쳤을 때엔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나 말을 걸게 된다. 묻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의심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이며, 아무 것도 모르면 알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화두를 처음 들 때는 그저 모르는 군중 속을 걷는 것과 같아서 지나쳐버리기 일쑤지만 계속해서 화두를 들다보면 익숙해지고, 친숙해져 마음이 가는 순간 강력한 의심이 들게 된다는 것이다. 의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마음이 저절로 가게 된다. 예를 들어 밤길을 혼자 걷는데 앞에서 이상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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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차이니르바나의 언덕에서 2020. 2. 2. 08:29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차이 마음이 요동친다. 요동치는 마음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은 사마타이고, 요동치도록 놔두고 관찰하는 것은 위빠사나이다. 대상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다. 대상에 반응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사마타이고, 반응하도록 놔두고 관찰하는 것은 위빠사나이다. 욕망이 일어난다. 일어나는 욕망에 적극적으로 방어하려고 하는 것은 사마타이고,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놔두고 ‘오! 나에게 이런 욕망이 있구나. 왜 이런 욕망이 일어나지?’라고 관찰하는 것은 위빠사나이다. 붙잡으려는 마음이 일어난다. 붙잡으려는 마음을 적극적으로 놓아버리려고 하는 것은 사마타이고, ‘내가 왜 이런 것을 붙잡으려고 하지?’라고 관찰하는 것은 위빠사나이다. 번뇌가 일어난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제거하려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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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거사 무심송니르바나의 언덕에서 2020. 1. 29. 09:44
◐ 방거사 무심송◑ 但自無心於萬物(단자무심어만물) 다만 스스로 만물에 마음을 주지 않으면 何妨萬物常圍繞(하방만물상위요) 만물이 항상 둘러싼들 어찌 방해가 되리 鐵牛不怕獅子吼(목우불파사자후) 무쇠 소가 사자후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恰似木人見花鳥(흡사목인견화조) 마치 나무 사람이 꽃과 새를 보는 듯하네 木人本體自無情(목인본체자무정) 나무 사람은 본래 그 몸에 정이 없으니 花鳥逢人亦不驚(화조봉인역불경) 꽃과 새가 그 사람을 만나도 놀라지 않네 心境如如只遮是(심경여여지차시) 마음과 경계가 여여함에 다만 이러할 뿐 何慮菩提道不成(하려보리도불성) 어찌 깨달음 얻지 못할 것을 염려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