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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라레빠의 십만송
    니르바나의 언덕에서 2020. 5. 4. 07:14

    밀라레빠 십만송

    이제까지 읽은 책 중에 가장 감동한 책이 두 권이 있는데 하나는 밀라레빠 십만송이고 다른 하나는 선관책진이다. 밀라레빠 십만송은 티벳의 위대한 수행자인 밀라레빠의 처절한 수행기와 깨달음의 노래이다. 선관책진은 중국 선사들의 처절한 수행기와 깨달음에 대한 기록이다.

    밀라레빠는 경이롭고 불가사의 한 분이다. 그의 고행은 붓다의 고행에 버금간다. 그는 티벳의 동굴에서 보릿가루를 먹으며 오랫동안 정진했다. 보릿가루가 떨어지자 쇠뜨기 풀죽만 먹으며 정진했다. 갈비뼈가 드러나고 몸의 색깔은 녹색을 띠었다. 그는 해탈하고서도 평생을 동굴에서 명상하며 지냈다. 그의 철저한 무소유의 두타행은 깟사빠 존자에 버금간다. 하지만 그가 위대한 것은 이런 외형적인 것이 아니다. 그가 위대함은 언어능력이다.(깨달은 자가 언어능력도 갖춘 것을 사무애해(四無礙解)를 갖추었다 함) 그는 시적 감성이 풍부한 시인이다. 그는 깨달음을 시로 노래했다. 법문과 대화가 모두 아름다운 시가 되어 저절로 흘러나온다. 그가 깨달음을 노래한 시가 무려 100,000송이다. 그래서 책의 이름이 밀라레빠 십만송이다. 붓다의 직계제자 중에서 시적 감성이 풍부한 왕기사 존자의 시도 장로게경에 나오는 71송이 전부다. 중국의 선시로 유명한 한산시도 300여편이 전부다. 이를 비교하면 십만송은 불가사의하지 않는가?

    밀라레빠의 수행법은 나로육법이다. 나로육법은 밀라레빠의 스승의 스승인 나로빠가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뜸모(생명열), 환신, 몽환, 정광명, 중유, 포와(의식전이)다. 이 수행법은 매우 난해하고, 실제로 깨달음, 열반, 해탈에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다. 정광명이 사마타의 니밋따와 비슷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스님도 있다. 티벳 불교는 크게 네 종파가 있는데, 그중 겔룩파는 교종이고 카규파는 밀라레빠에서 시작된 선종에 해당하지만, 현재는 카규파에서도 나로육법 수행자는 거의 없다고 한다. 나로육법에 대한 설명은 의미가 없어 생략한다.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수행법은 밀라레빠가 티벳의 양치기 소녀에게 가르친 ‘패 행법’이다.
    ~~~~~~~~~
    밀라레빠와 티벳 소녀의 대화(밀라레빠 십만송에서 발췌/이정섭 역)

    온 우주에 편재하는 진리의 몸[法身]은
    보현보살이요.
    장엄한 공덕의 다함없은 몸[報身]은
    번개를 지니신 부처요,
    중생들의 구세주인 화현의 몸[化身]은
    고따마 붓다이시네.
    삼신불의 모든 가르침은
    나의 법계(法系)에 전수되나니
    그대도 따르지 않으련가?

    이에 빼다붐은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법계는 참으로 훌륭하군요. 마치 설산(雪山)이 모든 강의 근원이 되는 것과 같군요. 제가 듣기로는 진리를 실천하는 선생님에게는 이른바 '외적인 스승'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한 스승에 의지해서 수행할 때 본생(本生)의 법신불을 본다고 하던데, 선생님에게는 어떤 스승이 계신가요? 그분은 누구신가요?"
    밀라레빠는 응답하였다.
    "스승에 관해서 나는 노래로 간단히 응답하겠다."

    바깥에서 참다운 지식을 전해주는 스승은
    외적인 스승이요,
    안으로 마음의 자각을 일깨우는 스승은
    내적인 스승이요,
    마음의 본질을 밝혀주는 스승은
    그대의 참 스승이네.
    나에게는 세 스승 모두 있나니
    여기, 그 스승을 믿고 따르길 원하는 제자 있느냐?

    소녀가 외쳤다.
    "참으로 훌륭한 스승들이네요! 마치 황금 사슬에 꿰어진 보석과 같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들에게 가르침을 구하기 전에 먼저 어떤 입문식이 필요한가요?"
    이에 밀라레빠는 노래로 답하였다.

    그대 머리 위에 놓인 물항아리는
    외적인 입문식이요,
    그대의 몸과 붓다의 몸이 다르지 않음을 증득함이
    내적인 입문식이요,
    마음의 정수를 깨치는 빛은
    완전한 입문식이네.
    나는 이 세 가지 입문식을 성취했나니
    여기, 입문을 원하는 제자 있느냐?

    빼다붐은 다시 외쳤다.
    "참으로 심오한 입문입니다. 이는 마치 온갖 산짐승을 다스리는 사자와 같군요. 제가 듣기로는 입문식이 끝난 뒤에 '정도(正道)로 인도하는 깨달음'이라는 심오한 가르침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시지 않겠어요?"
    그녀의 물음에 밀라레빠는 다시 노래하였다.

    외적인 가르침은
    듣고 생각하고 행함이요,
    내적인 가르침은
    깨어있음의 지순한 명정성(明淨性)이요,
    최상의 가르침은
    체험과 실재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음이라.
    나는 이 세 가지 가르침을 성취했나니
    여기, 이 가르침을 성취하려는 자 있느냐?

    빼다붐은 소리쳤다.
    "이 가르침은 흠집 하나 없는 거울 같아서 만상(萬像)을 모두 비추어내는군요."
    밀라레빠가 대답했다.
    "이 가르침을 성취하려거든 외딴곳으로 가서 수행해야 하리라."
    그러자 소녀가 물었다.
    "제게 수행 방법을 일러주세요."
    밀라레빠는 노래로 대답했다.

    외따로 떨어진 오두막에서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외적인 수행이요,
    내 몸을 아끼고 돌보지 않으면
    내적인 수행이요,
    혼자서도 넉넉하고 완전하면
    그것이 절대의 수행이네,
    이 세 가지 나는 모두 성취했으니
    여기, 이 가르침 따르려는 제자 있느냐?

    이 노래를 듣고 소녀는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수행은 하늘을 나는 커다란 독수리와 같군요. 뭇 새들은 겁에 질려 꼼짝도 못하겠어요."
    그녀는 계속 말했다.
    "'패 행법'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수행자의 명상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던데 이 행법에 관해서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밀라레빠는 노래로 응답하였다.

    바깥으로 산란한 마음에 '패 행법'을 행하면
    마음은 수렴되고,
    안으로 졸리는 마음에 '패 행법'을 행하면
    깨달음이 각성되네.
    본래 타고난 마음[眞我]에 안주하면
    지고한 '패 행법'이 되네.
    나는 세 가지 행법을 성취했나니
    여기, 이 행법을 알려는 자 있느냐?

    빼다붐은 탄복하며 외쳤다.
    "패 가르침은 참으로 놀랍군요! 마치 제왕의 칙어(勅語)처럼 깨달음을 재빨리 성취하겠군요. 그런데 이 행법을 행하면 어떤 체험을 하게 되나요?"
    이에 밀라레빠는 노래로 응답하였다.

    패 행법 통달한 명상자는
    만물에 편재하는 위대한 무위(無爲)의 뿌리를 체험하고,
    다함없이 투명한 무위와 정도(正道)를 체험하고,
    위대한 마하무드라인 무위의 열매를 따게 되리.
    나는 이 모든 것을 증득한 명상자.
    여기, 이를 바라는 제자가 있느냐?

    이때 빼다붐은 다시 말씀드렸다.
    "이 세 가지 체험의 가르침은,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높이 뜬 태양이 누리를 환히 비추는 것 같군요.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이네요. 그런데 선생님은 이 수행을 통해서 어떤 확신을 얻으셨나요?"
    밀라레빠는 다시 노래로 응답하였다.

    하늘나라도 없고 지옥도 없음은
    정견(正見)의 확신이요,
    명상도 없고 산란심(散亂心)도 없음은
    정행(正行)의 확신이요,
    희망도 없고 두려움도 없음은
    대성취의 확신이네.
    나는 이 세 가지 확신을 얻었나니
    여기, 이런 확신 구하는 사람 있느냐?
    ~~~~~~~~~
    여기에 나오는 ‘패 행법’은 아주 간단하다. 생각이 올라오면 ‘패!’라고 속으로 내뱉는다. 욕망이 올라오면 ‘패!’라고 내뱉는다. 분노. 시기, 질투, 인색, 우월감, 열등감, 자만심, 좋아함, 싫어함, 갈애, 집착, 두려움, 공포, 스트레스, 저항의식, 슬픔, 우울, 절망, 해태, 혼침, 들뜸, 후회.....
    어떤 감정이 올라오던지 ‘패!’라고 내뱉는다. 너무 쉽지 않은가? 생각과 감정이 올라오지 않아 완전한 부동심에 이를 때까지 계속한다. 물론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늘 알아차림을 유지해야만 ‘패!’라고 내뱉을 수 있다. 이 수행을 하는데 어떤 교학적, 지적 교리가 필요 없다. 고요와 평온에 도달하면 그때 가서 ‘무아 경’을 읽어볼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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